무사 스물. 비단옷 자제 하나.
낡은 목검 두 자루와, 솜털 난 사부 하나, 쇠고랑 찬 소녀 하나, 배고픈 너구리 하나.
패가 안 맞는 판이다.
저쪽은 진검에 갑주에 횃불이고 이쪽은 낡은 막대기 두 개에 굶은 식구 넷이다. 노름으로 치면 상대는 패를 다 깔았고 나는 빈손이다. 보통 같으면 자리를 뜬다.
근데 사기꾼은, 빈손일 때 제일 잘 친다.
보통 사부라면 여기서 검을 뽑겠지. 천하제일 검신이니까, 스물쯤은 숨 한 번에 쓸어버린다.
마음만 먹으면 된다. 봉인을 한 꺼풀 벗기면, 저 스물은 마당에 깔린 잡초처럼 눕는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고. 그건 너무 쉬워서, 오히려 함정이다.
근데 그게 함정이다.
내가 쓸어버리면, 하린은 또 누군가 자기를 구해 주는 걸 보게 된다. 평생 그래 왔다. 휘두르지 마라, 가만있어라, 네 일은 남이 해 준다. 그렇게 손이 묶인 거다.
구해 주는 손이, 결국 가두는 손이었다. 또 한 번 구해 주면, 나도 그 손이 된다.
이 판은, 내가 이기면 안 된다.
하린이 이겨야 한다.
내가 끼어들어 이겨 봐야, 하린은 또 남이 휘둘러 준 검에 기대게 된다.
"백 공자."
나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마당으로 나섰다. 횃불 스무 개 앞에, 솜털 난 애송이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폐품 도로 가져가신다고요? 환불은 안 된다면서요. 그새 마음 바뀌셨어?"
"닥쳐, 애송이."
백승호가 말에서 내렸다. 비단 장화가 진창을 밟았다.
"저년이 무관에서 검을 들었다는 소문 때문에 내가 우습게 됐다. '백승호가 키우다 버린 폐품이 천재였다'고? 그럼 내가 보는 눈 없는 병신이 되는 거 아니냐."
아, 그거였구나.
이놈은 하린이 아까운 게 아니다. 자기 체면이 아까운 거다. 버린 패가 알고 보니 끗발 좋은 패였다는 게, 견딜 수가 없는 거다.
호구가 패를 버린 뒤에야 그게 끗발인 걸 알면, 둘 중 하나다. 인정하거나, 그 패를 부숴 없던 일로 만들거나. 그릇이 작은 놈은 늘 후자를 고른다.
[패안(牌眼)] 패주: 백승호 · 백검문 자제 보이는 패: 무사 20, 일류 셋 숨은 패: 열등감 — 하린의 재능이 늘 자기보다 위였다 진짜 목적: 하린을 되찾는 게 아니라, 부수는 것 약점: 사람들 앞에서 체면이 깎이는 걸 죽기보다 싫어함
체면이 약점인 놈은, 체면으로 잡는다.
칼로 잡는 게 아니다. 호구는 늘 제 약점으로 무너진다. 저놈의 약점은 진검 스물이 아니라, 사람들 눈이다.
"백 공자. 제안 하나 하지."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무사 스물 풀지 마. 쪽팔리잖아. 천하의 백검문 자제가, 손 묶인 계집애 하나 잡으려고 떼로 덤볐다고 소문나면? 그게 더 병신 같지 않아?"
백승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정확히 아픈 데를 찔린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깔끔하게 가자. 쟤가, 손 묶인 채로, 너희 무사 셋을 못 막으면 — 데려가. 다리 분지르든 말든. 대신 쟤가 막으면, 넌 두 번 다시 이 동네 얼씬도 안 한다. 어때. 공자가 손해 볼 거 없잖아. 손 묶인 이류 계집애가 일류 셋을 어떻게 막아."
미끼를 던졌다. 호구가 제일 좋아하는 미끼. "넌 손해 볼 게 없다"는 말.
세상에 손해 안 보는 판은 없다. 근데 호구는 늘 그 말에 넘어간다. 공짜로 이기는 판이 있다고 믿으니까. 그 믿음이, 호구를 호구로 만든다.
"……재밌군."
백승호가 비웃었다. 체면을 세워 주는 판이라고 생각한 거다. 자기가 이기는 판이라고.
손 묶인 이류가 일류 셋을 막는다는 게, 저놈 눈엔 말이 안 됐다. 당연하다. 저놈은 하린의 진짜 패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까. 십수 년을 데리고도, 끗발을 끗발로 못 본 눈이다.
호구는 늘, 자기가 짠 줄 아는 판에서 진다.
"좋다. 막아 봐, 폐품."
하린이 마당 가운데로 끌려 나왔다.
손은 묶인 채. 발 앞엔 낡은 목검.
일류 무사 셋이 진검을 뽑고 그 애를 둘러쌌다. 횃불에 칼날이 시뻘겋게 일렁였다. 셋 다 키가 하린의 머리 하나는 더 컸다.
하린은 떨고 있었다. 검을 안 봤다. 땅만 봤다.
"휘두르면…… 맞아."
작게 중얼거렸다. 누구한테 하는 말도 아니었다. 평생 자기한테 한 말이었다. 십칠 년을 외운 주문 같은 거였다.
그 한마디에 가슴이 저릿했다. 회귀 전, 등 뒤에서 죽어 간 애들도 저런 말을 외우고 있었을지 모른다. 나서지 마라, 가만있어라, 그러다 등 뒤에서 식었다.
이번엔 다르게 가야 한다.
무사 하나가 검을 들어 올렸다.
나는 그 무사를 향해, 아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젊은 친구."
무사가 멈칫했다.
"그 검, 휘두르기 전에 잘 생각해. 검 모가지 날아가는 거, 일도 아니여."
"……뭐?"
무사는 코웃음 쳤다. 손 묶인 계집애 하나 앞에서, 무슨 헛소리냐는 듯이.
그래. 안 믿겠지. 나도 안 믿게 말했으니까. 저 경고는 무사한테 한 게 아니다.
하린한테 한 거다.
겉으로는 무사를 위협하고 속으로는 하린에게 패를 건넸다. 이 바닥에서 제일 비싼 기술이다. 한 마디로 두 사람한테 다른 말을 하는 거.
휘둘러도 돼. 이번엔 네가 맞는 게 아니라, 쟤가 날아가.
무사의 검이 떨어졌다.
하린의 어깨를 향해.
그 순간.
나는 봤다. 하린의 눈이, 처음으로 검을 봤다. 땅이 아니라, 자기 발 앞의 낡은 목검을.
십칠 년 만에, 그 애의 눈이 매가 아니라 검을 골랐다.
그리고 그 애가,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허락했다.
쩌엉!
쇠고랑이 끊어졌다.
목검이 아니었다. 그 애의 손목을 묶은 쇠가, 내공의 압(壓)을 못 견디고 터진 거다. 안에서부터. 십수 년 묶여 있던 사슬이, 그 애가 "휘둘러도 된다"고 마음먹은 순간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밖에서 누가 풀어 준 게 아니다. 안에서 끊은 거다. 그래서 아무도 다시 못 채운다. 이게 내가 노린 단 하나의 그림이었다.
[패안(牌眼)] 패주: 연하린 깨달음: 0 → 1 (절정 돌파) 막힌 곳 — "허락" (본인이 스스로에게 내줌) 변화: 묶인 검 → 제 검
목검이 그 애 손에 들렸다.
세 번 움직였다.
아니, 한 번처럼 보이는 세 번.
일류 무사 셋이 동시에 검을 놓쳤다. 손목이 꺾인 채. 누구도 그 애의 목검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못 봤다.
나조차 잔상만 봤다. 절정이다. 손 묶인 자리에서 한 합에 절정으로 뛴 거다. 영약 한 알 안 먹고 비급 한 장 안 보고. 그냥 제 안에 있던 패를, 제 손으로 까낸 거다.
마당이 얼어붙었다.
횃불을 든 무사 스물이, 숨도 못 쉬었다. 손 묶인 폐품이라고 깔보던 계집애가, 한순간에 제 동료 셋을 무릎 꿇린 걸 본 거다.
백승호가 입을 쩍 벌렸다.
"이, 이게…… 저 폐품이……"
"폐품이라더니. 누가 누구를 무릎 꿇렸나 봐."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공자가 못 본 거지. 끗발 좋은 패를, 끗발 없는 눈으로 봐서."
저 얼굴. 저 낙차. 이 맛에 사기를 친다. 호구가 제 손에 든 보물을 발로 차 버리고 그게 보물이었다는 걸 남의 손에서 깨닫는 얼굴. 세상에서 제일 고소한 표정이다.
하린이 천천히 백승호를 향해 돌아섰다.
목검 끝이, 그를 겨눴다. 평생 자기를 때린 자를.
백승호가 뒷걸음질 쳤다. 진검 스물을 거느리고도, 목검 하나에 뒷걸음질 쳤다.
"자, 잠깐. 약속했잖아. 내가 손해 볼 거 없다고—"
"손해 안 봤어. 네 무사들 다 살아 있잖아. 손목만 나갔지."
나는 끗발이를 어깨에 올렸다.
"대신, 두 번 다시 이 동네 얼씬도 안 한다. 약속이지? 사람은 배신해도, 노름빚은 못 떼먹거든. 이건 노름빚이야."
백승호는 무사들을 끌고 줄행랑쳤다. 올 때는 횃불 스물이더니, 갈 때는 등만 스물이었다.
하린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검을 쥔 손을 내려다봤다. 휘둘렀는데, 아무도 안 때렸다. 처음이었다.
십칠 년을 기다린 매가, 끝내 안 왔다. 그 애는 그 사실을 한참 동안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 애의 눈에서, 십칠 년 묵은 게 떨어졌다.
"……이제, 휘둘러도 돼?"
"네 검이잖아. 누구 허락도 필요 없어."
하린이 나를 봤다.
그 눈빛이, 어제와 달랐다. 세상 전부를 노려보던 눈이, 처음으로 한 사람을 — 똑바로 봤다.
나는 못 본 척, 하늘을 봤다.
귀찮게 됐다. 저런 눈은 사람을 따르게 만든다. 따르는 건, 결국 나 하나에 판돈을 거는 거고. 나는 그걸 제일 경계해야 하는데.
한 명한테 판돈이 몰리면, 그 한 명이 꺾일 때 다 죽는다. 회귀 전에 배운 거다. 가장 아프게.
근데 저 눈을 어떻게 막나. 십칠 년 만에 처음으로 사람을 믿어 보겠다는 눈인데.
"막판무관, 두 번째 학생."
그래도 일단은.
"진짜로 환영한다, 하린아."
옆에서 나찬이 입을 삐죽였다.
"……막내한테 따이는 첫째 되기 싫은데."
낮에 한 합에 목검이 갈라진 걸 떠올린 모양이었다. 천재가 천재를 무서워하기 시작했다. 좋은 그림이다. 서로 무서워해야, 서로 키운다.
천재 둘. 무관 하나. 검 한 번 안 뽑은 사부 하나.
판은 좋은데, 곳간이 문제였다.
딜에 앉힌 천재: 1명 → 2명 (나찬 · 일류 / 연하린 · 절정). 검신의 정체: 미발각 (검 한 번 안 뽑음). 새 미결산: 막판무관에 천재 둘. 그런데 곳간은 텅 비었다. 혈겁까지: 약 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