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 소개

웹 무료 미리보기 · 11 / 20화

천재는 사기로 키운다

1부 · 안 휘두르는 칼

사갈이 흘린 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윗선이 이 동네 천재 떡잎들을 싹 쓸어 모은다.

밤새 그 말을 패처럼 뒤집어 봤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같은 그림이 나왔다.

누가, 천재가 버려지도록 판을 깔아 두고 줍기 좋게 모으고 있다.

도박촌에 천재가 자꾸 흘러드는 게 우연일 리 없다. 묘판에 모종이 저절로 자라는 법은 없으니까. 누군가 씨를 뿌려 둔 거다. 버려진 척, 굴러다니는 척, 줍기 딱 좋게.

그렇다면 — 아직 안 주워진 떡잎이, 이 도박촌 어딘가에 더 있다는 거다.

남이 줍기 전에, 내가 먼저 줍는다. 사기꾼의 첫 번째 법칙. 호구가 눈치채기 전에 패를 가져가라.

"끗발이. 코 좀 빌리자."

너구리가 두 동강 난 판자를 새끼줄로 동여 다시 세운 평상 위에서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공짜로 먹여 주는 줄 아냐? 밥값 해."

그 말에 끗발이가 마지못해 어깨로 기어올랐다. 영물 주제에 게으른 건 또 어디서 배웠는지.

나는 끗발이를 어깨에 올리고 도박촌을 돌았다.

골패 소리가 새어 나오는 뒷골목. 술 토한 냄새와 시궁창 냄새가 뒤섞인 길. 사람을 사고파는 동네는 어디든 냄새부터가 다르다. 돈 냄새 밑에 늘 썩은 냄새가 깔려 있다.

뒷골목, 시궁창 냄새 나는 짐꾼 거리에서.

끗발이가 갑자기 미친 듯이 털을 곤두세웠다.

"끗! 끗! 끗!"

지금껏 들은 것 중 가장 사나운 울음이었다. 나찬을 봤을 때보다, 하린을 봤을 때보다, 더.

내 어깨를 발톱으로 파고들 정도였다. 작은 몸이 활처럼 떨었다. 이놈이 이렇게 우는 건, 패가 있다는 정도가 아니다. 판을 통째로 뒤집을 패가 있다는 거다.

나는 침을 삼켰다.

끗발이가 가리킨 곳에—

산만 한 사내가 있었다.

키가 나보다 두 자는 컸다. 어깨는 황소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를 피해 빙 둘러 갈 만큼, 그냥 서 있기만 해도 길이 막히는 덩치였다. 등에는 낡은 도(刀) 한 자루가 천으로 칭칭 감겨 있었다. 뽑지 못하게, 일부러 묶어 둔 것처럼.

그 거구가, 짐을 나르고 있었다. 제 키만 한 쌀가마를 한 손에 하나씩, 둘씩 들고도 숨 한 번 안 찼다.

그리고 그 거구를, 왈패 넷이 둘러싸고 두들기고 있었다.

"야, 이 둔한 새끼야! 짐삯 내놔!"

퍽. 퍽.

거구가 맞았다. 주먹이 황소 같은 어깨에 박혔다. 때린 왈패가 오히려 손목을 털었다. 바위를 친 것처럼.

그런데 그는 — 안 막았다. 손 하나 안 들었다. 그냥 맞았다. 거대한 몸을 잔뜩 웅크리고 벌벌 떨면서. 산만 한 덩치가, 제 절반도 안 되는 왈패 앞에서 작아지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상한 그림이었다.

저 몸으로 마음만 먹으면 왈패 넷쯤 손가락으로 튕겨 낼 텐데. 맞고만 있다. 맞는 게 익숙한 놈의 자세였다. 오래, 아주 오래 맞아 온 자세.

도박판에서 저런 자세를 본 적 있다. 돈을 다 잃고도 자리를 못 뜨는 호구. 질 걸 알면서 질 자격밖에 없다고 믿는 놈의 등.

나는 패안을 열었다.

그리고 숨이 멎었다.

[패안(牌眼)] 패주(牌主): 미상 거한 · 20세 추정 보이는 패: 도(刀) — 삼류 (스스로 봉인) 숨은 패: ──측정 곤란── 그릇: 화경(化境). 백 년이 아니라, 천 년에 하나. 깨달음: 0 막힌 곳: 벽이 아니라 — 공포

손이 떨렸다.

패안이 처음으로 "측정 곤란"을 뱉었다. 나찬을 읽을 때도, 하린을 읽을 때도 숫자는 또렷이 떴다. 근데 이놈은, 잣대가 닿질 않았다.

나찬이 백 년에 하나였다. 하린이 그 위였다.

이 사내는 — 그릇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화경. 회귀 전, 나조차 평생을 바쳐 닿은 경지. 천하제일 검신이 전생의 수련을 갈아 넣고서야 디딘 그 자리를, 이놈은 그냥 담을 그릇으로 타고났다.

그걸 담을 그릇을 타고난 놈이, 짐꾼으로 처박혀 맞고 있다.

농담 같았다. 천 년에 한 번 나올 칼이, 쌀가마 밑에 깔려 녹슬고 있는 게.

왜 안 휘두르지?

저 안에 천 년에 하나 나올 칼이 잠들어 있는데. 손가락만 까딱해도 이 골목을 평지로 만들 힘이, 왜 제 몸 하나 못 지키지?

막힌 곳은 벽이 아니라 공포라고 패안이 적었다. 벽은 넘으면 그만이다. 근데 공포는 — 넘는 게 아니라 마주 봐야 하는 거다. 그게 까다롭다.

왈패가 마지막으로 거구의 등을, 천으로 감긴 도를 발로 걷어찼다.

"이 고철 덩어리는 또 뭐야? 팔아먹게 풀어 봐."

거구가, 처음으로 움직였다.

번개 같았다. 그 큰 몸이, 그렇게 빠를 수 있나 싶게.

도를 두 팔로 끌어안았다. 빼앗기지 않으려는 게 아니었다.

풀리지 않게 끌어안는 거였다. 제 칼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제 몸으로 막아 안는.

"안…… 돼요."

거구의 목소리가, 산만 한 덩치에 안 어울리게 떨렸다. 다 큰 사내의 입에서 나온 게, 매 맞는 아이의 목소리였다.

"풀면…… 사람이 죽어요."

골목 공기가 한순간 서늘해졌다. 왈패들도 그 목소리에 잠깐 멈칫했다.

왈패들이 시시하다는 듯 침을 뱉고 떠났다. 더 두들겨 봤자 돈 한 푼 안 나온다는 걸 안 거다. 호구도 거덜 나면 버린다.

거구는 한참을 웅크린 채로 있었다. 떠난 발소리가 다 사라지고 나서야, 천천히 몸을 폈다.

나는 거구 앞에 쪼그려 앉았다. 쪼그려 앉아도 그의 무릎쯤이었다. 올려다보는 목이 다 아팠다.

"안 아파?"

거구가 흠칫 나를 봤다. 누가 말을 걸어 준 게 낯선 모양이었다.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너 그 덩치로 왜 맞고 있냐."

거구가 고개를 숙였다. 산만 한 어깨가 더 둥글게 말렸다.

"휘두르면…… 안 되니까요."

"그 등에 진 거, 칼이지? 왜 천으로 묶어 놨어."

거구의 몸이 움찔했다. 내가 칼 얘기를 꺼낸 것만으로, 다시 떨기 시작했다.

"못 뽑게요. 영영."

나는 천으로 칭칭 감긴 도를 봤다. 매듭이 수십 겹이었다. 단순히 묶은 게 아니라, 묶고 또 묶고 또 덧대 묶었다. 누가 시킨 게 아니다. 본인이, 제 손으로, 제 칼을 봉인했다.

봉인.

그 단어가 가슴에 걸렸다. 나도 봉인을 하나 지고 산다. 다만 내 건 들키지 않으려고 잠근 거고 이놈 건 — 누굴 또 죽일까 봐 잠근 거다. 같은 자물쇠인데, 채운 이유가 정반대였다.

하린은 쇠고랑에 묶여 있었다. 남이 채운 거였다. 제 힘으로 끊어도 된다는 걸 믿게 해야 했다.

이 녀석은, 제가 저를 묶었다. 그래서 더 어렵다. 남이 채운 자물쇠는 부수면 그만이지만 제가 채운 건 제가 풀어야 한다.

"이름이 뭐야."

"……두식이요. 그냥, 두식."

성도 없는 이름이었다. 버려진 놈들은 대개 성을 못 가진다.

"두식아."

나는 그 거대한 어깨를 툭, 쳤다. 바위를 친 것 같았다. 근데 그 바위가, 내 손길 하나에 또 움찔했다.

"너, 그 칼 풀면 사람을 죽인다고 했지."

두식의 눈에 물기가 차올랐다. 거구의 눈에서 물이 도는 건, 묘하게 더 처참했다.

"그럼 안 풀면, 사람을 살리고?"

두식이 멈칫했다.

대답을 못 했다. 입술만 달싹였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는 놈의 얼굴이었다.

그 눈을 보고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칼을 풀면 사람이 죽는다던 말. 단순한 겁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누구를, 어떻게 잃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이 녀석 입으로 들어야 한다.

지금 보이는 건 제 칼을 무서워하는 손뿐이었다. 맞아도 안 뽑고, 빼앗으려 들면 풀리지 않게 끌어안는 손. 아예 패를 안 까기로 한 놈의 손이었다. 짐가마 밑에 칼을 묻고 제 재능을 묻고 사람을 피해 골목으로 숨어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릎이 시큰했다.

도박촌에 떡잎이 더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다. 근데 화경의 그릇일 줄은 몰랐다. 윗선이 왜 이 동네를 묘판으로 골랐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여긴, 물건이 굵다.

남이 줍기 전에, 내가 주웠다. 그것만으로도 오늘 장사는 본전을 넘겼다.

문제는, 이 패를 어떻게 까느냐다. 분노로 푼 놈도, 허락으로 푼 놈도 있었지만 — 공포는, 처음이다.

막판무관, 세 번째 패를 찾았다 — 천 년에 하나, 화경의 그릇 '두식'. 막힌 곳: 분노(나찬)도, 허락(하린)도 아닌 — 공포. 검신의 정체: 미발각. 딜에 앉힌 천재: 2명(나찬·하린). 혈겁까지: 약 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