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식이 얼어붙었다.
매듭 위에 얹힌 손가락이, 돌처럼 굳었다. 풀던 천 한 가닥이 손등에 걸린 채로,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의 목에 칼날이 닿기 직전인데. 천 년에 하나 나올 칼이, 또 멈췄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십 년 전의 도기가 아이에게까지 뻗을까 봐.
50까지 무너졌던 공포가, 마지막 한 칸을 앞두고 다시 솟구쳤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베어선 안 된다는 그 공포가, 가장 절실한 순간에 가장 크게 차오른 거다. 공포는 늘 그렇다. 정말 휘둘러야 할 때, 가장 무겁게 손을 누른다.
판이 어긋났다.
내가 짠 판이, 두식의 공포 앞에서 무너졌다. 98에서 50까지 무너뜨린 자물쇠가, 마지막 한 칸에서 도로 잠겼다.
이게 패안의 한계다. 패는 읽어도, 대신 둬 줄 순 없다. 깨달음은 본인이 훔쳐야 하고 — 두식은, 마지막 순간에 손을 거뒀다.
판을 깔아 주는 것까지가 딜러의 일이다. 칩을 미는 건 손님 손이다. 그걸 알면서도, 손님이 패를 못 받는 걸 보는 건 — 미칠 노릇이었다.
나찬과 하린이 잔당을 뚫고 달려갔지만 너무 멀었다. 광장 끝에서 끝이었다. 못 닿는다. 일류의 보법으로도, 절정의 검으로도, 저 거리는 한 호흡에 못 지운다.
"비켜! 비키라고!"
나찬이 앞을 막는 잔당을 검등으로 후려치며 길을 텄다. 하린이 그 옆을 달렸다. 둘 다 얼굴이 하얘져 있었다. 둘의 검이 아무리 빨라도, 아이와 부하 사이의 한 뼘을 먼저 메울 순 없었다. 둘도 그걸 알았다. 그래서 더 필사적으로 뛰었고 그래서 더 늦었다.
진가의 부하가 아이의 목에 칼을 바짝 붙였다.
아이가 죽는다.
내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봉인 안쪽으로.
단전 깊은 곳, 전생 내내 갈고닦은 진력이 거기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손끝이 그 자물쇠를 더듬었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한 꺼풀만 열면, 모든 게 끝난다.
여기서 검을 뽑으면, 끝난다. 진가의 부하 따위, 검신의 손짓 한 번이면 재가 된다. 손가락을 튕기는 것보다 쉽다. 아이는 산다. 지금 당장. 이 광장의 누구도 안 죽는다.
손끝에 진력이 차올랐다. 봉인이 한 꺼풀, 열리려 했다. 십 년 묶인 두식의 칼처럼, 회귀 뒤 스스로 묶어 둔 내 칼도 풀려 나오려 했다.
그 순간, 내 어깨 위에서 끗발이가 미친 듯이 울었다.
"끗! 끗! 들킨다!"
거짓을 짚는 "구라"도, 위험을 짚는 사나운 울음도 아니었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내 봉인이 한 톨이라도 새 나가면, 정체가 들킨다는 경보. 이 영물은, 손해 보는 판엔 제 주인 편도 아니다. 내가 검신으로 돌아가려는 그 찰나를, 가차 없이 물어뜯었다.
이 광장에 눈이 몇인가. 짐꾼 스무 명. 잔당 스무 명. 죽은 척 엎드린 자들까지. 검신의 진력이 한 자락만 풀려도, 그중 누군가는 본다. 그리고 소문은 거기서 난다. "애송이 노름꾼이 사실은—" 하는, 가장 위험한 소문.
안 돼.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 한 꺼풀을, 손끝에서 도로 눌렀다.
내가 나서는 순간, 또 그 판이 된다.
"강한 놈 하나가 다 해결해 주는" 판. 모두가 그 한 장에 기대는 판. 두식은 평생 "사부가 대신 해 줬다"고 기억할 거고 다시는 제 칼을 못 잡을 거다. 그리고 나는 또, 혼자 짊어진 천하제일로 돌아간다.
한 장에 모두가 판돈을 거는 판. 그 한 장이 안 꺾이면, 나머지가 다 죽는 판.
그 판의 끝을, 나는 안다.
시체의 산이다.
비가 내리고 핏물이 화투패 뒤쪽 같던. 내 발밑에 무림이 통째로 죽어 있던. 마지막까지 내 등을 지키다 죽은, 끝내 이름을 불러 주지 못한 그놈의 얼굴.
지금 검을 뽑아 아이를 살리면, 그건 그 산의 첫 삽이다. 한 명을 살리려고 검을 뽑고 그다음엔 둘을 살리려고 그다음엔 천하를 살리려고 — 그렇게 또 모두가 내 한 장에 기댄다. 그리고 끝내, 나 혼자 남는다.
아이 하나를 지금 살리는 것과, 두식이 평생 제 칼로 사람을 지키게 만드는 것.
딜러는, 눈앞의 한 판이 아니라 판 전체를 본다.
손끝의 진력을, 도로 눌렀다.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게 고였다.
이 충동을 누르는 게, 검을 뽑는 것보다 백 배 힘들었다.
평생 검을 뽑는 법만 익혔지, 안 뽑는 법은 이번 생에 처음 배운다. 손이 떨렸다. 칼 한 번에 산을 가르던 손이, 안 뽑으려고 떨렸다.
확실하지 않으면, 검을 안 뽑는다. 노름판에서 배운 신조다. 근데 지금은 확실했다. 검을 뽑으면 아이가 산다는 게, 칼끝처럼 또렷했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확실한 판에서 패를 안 까는 건, 노름꾼한테 제 살을 깎는 일이니까.
그래도 안 깐다. 이 한 판을 따려고 판 전체를 잃을 순 없으니까. 아이 하나 살리겠다고 검신으로 돌아가면, 그 끝엔 또 시체의 산이 기다린다. 나는 그 산을 한 번 봤고 두 번은 안 본다.
대신, 나는 외쳤다.
목이 찢어져라.
"두식아!"
두식의 굳은 눈이, 나를 향했다. 텅 빈 눈이었다. 십 년 전 그 밤으로 도로 빨려 들어간 눈.
그 눈을, 끄집어내야 했다. 과거에서, 지금으로. 떠밀어선 안 된다. 공포는 미는 만큼 단단해지니까. 끌어내야 한다. 그가 십 년을 외면한 그 마음을, 제 손으로 다시 쥐게.
"두식아, 저 아이를 봐! 네가 지키고 싶은 사람이잖아! 칼을 막고, 아이 앞에서 멈춰!"
두식의 동공이 커졌다.
누이는 십 년 전에 죽었다. 그날 두식은 칼을 들었고, 멈추지 못했다. 지금 필요한 건 더 세게 베는 힘이 아니었다. 지킬 사람 앞에서 멈추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날 네 칼이 어디까지 갔는지 기억하지! 오늘은 저놈의 칼만 끊어! 아이까지 베지 말고, 거기서 멈춰!"
아이의 목에서, 핏방울이 맺혔다. 진가의 부하가 칼날을 슬쩍 그은 거다. 두식을 끌어내려는 협박.
붉은 한 점이, 아이의 흰 목에 또렷했다.
"아직 살릴 수 있잖아, 두식아! 저 아이, 아직 살아 있잖아!"
두식의 눈에서, 무언가가 깨졌다.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평생 그를 묶어 온 공포가, 그보다 더 큰 것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 십 년을 채워 온 자물쇠가, 마침내 통째로 부서지는 소리.
지키고 싶다.
공포보다 깊은 곳에 있던, 그 마음. 십 년을 매듭 밑에 눌러 둔, 그 한마디.
휘두르면 죽인다는 공포보다, 안 휘두르면 또 잃는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사람을 움직이는 건, 결국 더 큰 쪽이다.
[패안(牌眼)] 패주: 두식 공포: 50 → ??? (붕괴 중) 그 아래에서 떠오르는 것 — "이번엔, 지킨다" 손가락이 다시 — 매듭으로 간다.
두식의 거대한 손이, 등 뒤로 갔다.
이번엔, 떨지 않았다.
그 손이 매듭에 닿는 짧은 순간이, 십 년처럼 느껴졌다. 나도, 나찬도, 하린도, 광장의 모두가 그 손끝만 봤다. 풀리느냐, 또 멈추느냐. 이번 한 발에 아이의 목숨이 걸려 있었다.
매듭을 잡았다.
수십 겹, 십 년을 묶어 온 천 매듭을. 사람 하나에 한 겹씩, 죄책감 하나에 한 겹씩 묶어 온 그 매듭을.
한 번에.
뜯었다.
콰득.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광장을 갈랐다. 불길도, 비명도, 잠깐 멈춘 것 같았다. 그 소리 하나에.
처음으로, 두식의 도가 — 빛을 봤다.
십 년 만에 햇빛도 아닌 횃불 빛을, 처음 본 칼날이. 시뻘건 불빛을 받아, 칼이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였다.
순간, 광장의 공기가 통째로 무거워졌다. 짐꾼들이 숨을 멈췄다. 잔당들이 뒷걸음질 쳤다. 칼 한 자루가 뽑힌 것뿐인데, 다들 본능으로 느낀 거다. 지금까지 맞고만 있던 그 짐꾼이, 사실은 무언가 다른 존재였다는 걸.
내 어깨 위에서, 끗발이가 울음을 뚝 그쳤다. "들킨다"는 경보도 멎었다. 풀려던 내 봉인이 도로 잠겼으니까. 위험이 지나간 거다 — 적어도, 내 쪽 위험은.
나는 봉인을 안 풀었다. 끝까지, 안 풀었다. 입술에서 흐른 피를 손등으로 훔쳤다. 그게 오늘 내가 흘린 전부였다.
대신 두식이, 제 봉인을 풀었다.
이게 맞다. 검신이 한 꺼풀 여는 것보다, 짐꾼 하나가 십 년 묶은 매듭을 제 손으로 뜯는 게, 백 배 값진 패다.
두식, 십 년 묶은 칼의 봉인을 제 손으로 뜯다. 한세류, 검을 뽑고 싶은 충동을 피 흘리며 끝까지 눌렀다. 아이의 목에 칼이 닿은 순간 — 두식의 칼이 깨어난다. 딜에 앉힌 천재: 2명(나찬·하린). 혈겁까지: 약 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