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이 되고 나서야 알았다.
천하제일은 자리가 아니라 형벌이라는 걸.
내 발밑에, 무림이 통째로 죽어 있었다.
시체의 산 위에 나 혼자 서 있었다.
비가 내렸다. 핏물이 섞여 분홍빛이었다. 우습게도 그 색이 화투패 뒤쪽 같다고 생각했다. 평생 패만 들여다본 놈은, 천하가 무너진 자리에서도 패 생각을 한다.
내 이름은 한세류. 사람들은 나를 검신(劍神)이라 불렀다.
천하에서 가장 강한 칼. 무림의 마지막 희망. 모두가 나 하나에 판돈을 걸었다.
그래서 나는 살아남았다.
나만.
남궁세가의 검귀도, 사천당가의 독후(毒后)도, 나와 같이 늙어 가던 벗들도, 내가 거두려다 일찍 꺾어 버린 후배들도 — 전부 내 등 뒤에서 죽었다. 나를 살리려고.
마지막까지 내 등을 지킨 놈의 얼굴이, 빗물에 씻겨 가물거렸다. 이름이 뭐였더라. 나는 그 이름조차 끝까지 못 외웠다. 패는 다 읽으면서 사람 이름 하나는 못 외운 거다.
혈겁(血劫)이라 했다. 하늘이 무너진 날.
검신이 있는데 왜 못 막았느냐고?
막았다. 나는 다 막았다.
혼자서는 다 못 막는다는 것만 빼고.
도박을 치고 칼을 휘두른 평생, 그제야 깨달았다. 처음부터 패가 잘못 짜여 있었다.
모두가 한 장에 거는 판은, 그 한 장이 꺾이는 순간 끝난다.
내가 안 꺾였으니, 다 죽은 거다. 내가 너무 강해서.
그게 제일 우스운 대목이었다. 약해서 진 게 아니라, 너무 강해서 졌다. 다들 나만 믿고 제 칼을 갈 생각을 안 했으니까. 천하제일이 한 명 있으면, 나머지는 전부 그 한 명의 호구가 된다.
"……전부, 내 잘못이군."
천하제일의 손이 떨렸다. 칼 한 번에 산을 가르던 손이, 빗물 한 줌에 떨렸다.
판이 엎어졌다. 테이블엔 카드가 한 장 남았다. 나였다. 이긴 게 아니라, 끝까지 안 죽은 거였다. 노름판에서 그런 패를 뭐라고 부르는지 안다. 외톨이 끗. 혼자 남아서 딸 게 없는 패.
사기꾼은 죽을 때도 한 판은 친다.
나는 비 오는 시체 산 위에서 마지막으로 패를 깔았다.
담보는 내 죽음. 판돈은 내 저승.
외상으로, 한 판만.
칼끝을 내 심장에 댔다. 손끝이 더는 안 떨렸다. 평생 처음으로, 이길 자신이 없는 판에 거는 거였으니까. 분홍빛이 시야를 덮었다.
올인이다.
차가운 물벼락에 눈을 떴다.
"이 새끼가 어디서 약을 팔아!"
뺨이 얼얼했다. 누가 내 멱살을 쥐고 있었다.
천장이 낮았다. 기름때 전 등롱. 술 냄새. 골패 부딪는 소리. 어디선가 여자가 깔깔 웃었다. 코끝으로 들어오는 건 피 냄새가 아니라 싸구려 술과 땀 냄새였다.
도박장이었다.
내 손을 봤다.
작았다. 솜털이 보송했다. 칼 한 번 안 잡아 본, 굳은살 없는 손. 검을 삼십 년 쥔 손에 박여 있던 굳은살이, 한 점도 없었다.
벽에 걸린 구리 거울에 비친 얼굴을 봤다.
코 찔찔이 애새끼가 거기 있었다.
"……열여덟."
회귀였다.
검신이 되기 한참 전. 천수(千手)라는 이름으로 노름판이나 털고 다니던 애송이 시절. 천하제일 검신이, 솜털도 안 벗은 열여덟으로 돌아온 거다.
외상이 받아들여졌다.
저승의 누군가가, 미친 노름꾼의 마지막 베팅을 받아 준 모양이었다.
습관처럼 단전을 더듬었다.
비어 있지 않았다. 검신의 모든 것이 거기 그대로 있었다. 다만 — 단단히 잠겨 있었다.
[패안(牌眼)이 떠올랐다.]
눈을 뜨자 세상이 패로 보였다.
[패안(牌眼)] 패주(牌主): 한세류 · 18세 보이는 패: 삼류 사기꾼 애송이 숨은 패: 검신 — 언제든 봉인 해제 가능 외상(外上): 죽음을 담보로 빌린 한 판. 이 인생은 통째로 빚이다. 비고: 검을 뽑는 순간, 또 '천하제일'이 된다. 그 한 장에 모두가 판돈을 걸겠지.
웃음이 나왔다.
힘이 줄어든 게 아니었다. 봉인은 내가 나를 가둔 거다. 들키지 않으려고.
마음만 먹으면 이 도박장을, 이 성을, 무림 전체를 도로 손에 쥘 수 있다. 검신이니까.
근데 바로 그 패가, 모두를 죽였다. 가장 강한 카드 한 장.
두 번은 안 한다.
이번엔 검을 뽑지 않는다. 이번엔 내가 이기는 게 아니라, 남을 이기게 만든다. 그게 외상으로 받은 두 번째 인생에서 내가 칠 판이다.
"뭐가 그렇게 웃겨, 이 사기꾼 새끼야."
멱살을 쥔 건 도박장 왈패였다. 셋. 뒤에 골패상이 팔짱 끼고 나를 노려봤다. 바닥엔 가짜 패가 굴렀다. 사기 치다 걸린 모양이었다. 회귀 직전의 내가.
좋은 첫 패는 아니었다. 죽었다 살아난 첫날부터 멱살이라니.
나는 그 주먹을 안 봤다. 봉인을 풀 생각도 없었다.
확실하지 않으면, 검을 안 뽑는다. 노름판에서 배운 신조다. ……원래는 '배팅'이었지만 한 끗 틀었다.
삼류 왈패한테 검신은 사치다. 모기 잡자고 벼락을 부를 순 없다.
대신 골패상의 눈을 봤다.
패안이 그의 손을 읽었다.
패주: 골패상 황가 보이는 패: 정직한 물주 행세 숨은 패: 소매 안 — 가짜 골패 일곱 짝 거짓: 이 판은 처음부터 그가 짜고 친 사기다
호구를 등치는 사기꾼은, 자기가 등쳐질 줄 모른다.
그게 이 바닥의 첫 번째 법칙이고 동시에 내가 평생 밥 벌어먹은 구멍이다.
"형씨."
나는 멱살 잡힌 채로, 아주 능청스럽게 웃었다. 천수(千手)의 웃음이었다. 솜털 난 애송이 얼굴에 그 웃음이 걸리니, 골패상의 눈썹이 꿈틀했다. 애새끼 얼굴에서 환갑 노름꾼의 눈을 본 거다. 본능적으로 뭔가 어긋났다는 걸 느낀 거지.
"동작 그만."
골패상의 손이 멈칫했다.
"……밑장 빼기냐? 소매에 가짜 골패 일곱 짝. 이 판, 형씨가 짠 거잖아. 안 그래?"
도박장이 조용해졌다. 골패 소리도, 여자 웃음소리도 뚝 끊겼다.
골패상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호구를 등쳐 번 돈은, 들키는 순간 그를 죽일 동아줄이 된다. 노름판의 규칙이다. 사기는 쳐도 되지만 들키면 안 된다.
"이, 이 애새끼가 헛소리를—"
"소매 털어 봐. 일곱 짝 없으면 내가 손모가지 내놓지."
침묵.
골패상은 소매를 못 털었다. 일곱 짝이 거기 있었으니까.
내 멱살을 쥐었던 왈패의 손이 슬그머니 풀렸다. 이제 이 판의 호구는 내가 아니었다. 골패상이었다. 패가 한 바퀴 돌아, 칼자루가 손을 바꿨다.
"……얼마면 돼."
골패상이 이를 갈며 물었다.
"많이는 안 받아. 여기 깔린 판돈만 챙길게. 실랑이할 시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을 털었다.
"—다음 판을 치는 게 남는 장사거든."
판돈을 쓸어 담았다. 은자가 제법 됐다. 죽었다 살아난 첫날치곤 나쁘지 않은 수입이었다.
검을 뽑지 않았다. 봉인을 풀지 않았다. 정체를 한 톨도 흘리지 않았다.
그냥 패를 읽었을 뿐이다.
이게 내 방식이다. 이번 생의 방식.
밖으로 나오는데, 발밑에서 뭔가 굴러 나왔다.
판돈 자루에 끼어 있던 거였다. 손바닥만 한 너구리. 영물(靈物)이었다. 골패상이 키우던 재수 부적인 모양이었다. 등쳐먹은 김에 딸려 온 거다.
너구리가 나를 빤히 보더니, 코를 킁킁댔다.
"끗."
"……너 말하냐?"
"끗!"
배가 고픈 모양이었다. 사기꾼한테 딸려 왔으니 앞으로 굶을 일만 남았지.
"가라. 나 호구 아니다. 너 먹일 돈 없어."
내가 등을 돌리는데, 너구리가 갑자기 털을 곤두세웠다.
그러더니 길 건너편을 향해 발딱 섰다.
"끗! 끗!"
길 건너, 비를 쫄딱 맞은 청년 하나가 짐수레에 처박혀 있었다.
비단옷을 입었는데 흙투성이였다. 두들겨 맞고 버려진 꼴이었다. 입에선 피가, 눈에선 독기가 흘렀다.
그냥 두들겨 맞은 도련님이었다.
내가 눈을 좁혔다.
패안이, 멋대로 그 청년을 읽었다.
[패안(牌眼)] 패주(牌主): 미상 · 19세 추정 보이는 패: 만년삼왕정(萬年三王精) — 영약. 내공 60년 (산 것) 숨은 패: ??? — 백 년에 하나 나올 검재(劍才) 깨달음: 0 막힌 곳: 일류의 벽 항목은 "산 내공으로는 못 넘는다"
손이 멈췄다.
백 년에 하나.
저런 재능을 나는 안다. 회귀하기 전, 저런 놈들이 내 뒤에서 죽었다. 도구로 쓰이다, 꺾이다, 잊혀서. 이름도 못 외운 채로 등 뒤에서 죽어 간 그 얼굴들 중 하나가, 지금 길 건너 빗물 속에 처박혀 있었다.
이번 생엔 안 죽인다.
아니, 정확히는 — 안 죽게 만든다. 내 손으로 살려 주는 게 아니라, 제 손으로 살아남게.
너구리가 나를 올려다보며 또 한 번 울었다.
"끗."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패 있다.
빗속에서, 나는 평생 처음으로—
천하제일이 아니라, 딜러가 되기로 했다.
칼을 쥔 손이 아니라, 패를 돌리는 손. 내가 이기는 판이 아니라, 남이 이기게 깔아 주는 판.
"……야, 너구리."
나는 자루를 고쳐 멨다.
"끗발이라고 부르자. 우리, 사람 장사 좀 하자."
길 건너 청년이, 피 묻은 눈으로 하늘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반드시, 나가(羅家) 놈들을 죽인다."
복수심으로 이글거리는 눈이었다. 좋다. 분노는 좋은 종잣돈이다. 굴리기 나름이니까.
나는 빗속으로 첫걸음을 뗐다. 외상으로 빌린 두 번째 판의, 첫 패를 주우러.
검신의 정체: 아직 아무도 모른다. 딜에 앉힌 천재: 0명. 혈겁까지: 약 2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