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선 어쩌고 하던 그 새끼, 뒤 밟아 봤어."
다음 날. 나는 나찬에게 어젯밤 알아낸 걸 풀어놨다.
밤새 한숨도 안 잤다. 죽었다 살아난 지 며칠 만에, 잠보다 급한 게 생겼다. 어제 추출당 그늘에서 본 그 문양. 혈겁의 첫날에 봤던 그것. 그게 다시 내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잠이 올 리가 없었다.
검은 상자를 든 사내는 영약을 회수해 성 밖으로 나갔다. 나는 끗발이를 시켜 냄새를 쫓게 했다. 영물 너구리의 코는 사냥개 백 마리 값을 한다.
끗발이는 밤새 골목을 누비더니, 새벽녘에 흙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다. 코끝에 거미줄을 묻힌 채 "끗" 하고 보고를 올렸다. 밥값은 하는 놈이다.
"그놈, 영약을 어디로 가져갔게?"
나찬이 죽그릇에서 고개를 들었다.
"……어디로."
"무림맹."
나찬이 멈칫했다. 떠먹던 숟가락이 허공에 멎었다.
"정파 본산, 천하의 협(俠)이 모인다는 데 있잖아."
영약은 무림맹 산하 한 명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명문은, 그 영약을 자기 가문의 후기지수 하나에게 먹이고 있었다.
또 다른 나찬을 만들고 있었던 거다.
나찬의 얼굴이 굳었다. 제 몸을 단지로 쓰던 가문에서 벗어난 게 어제다. 그런데 자기 같은 단지가 하나 더 있다는 걸, 그것도 천하의 정파가 빚고 있다는 걸 지금 들은 거다.
"……정파가? 정파가 왜?"
"천재를 만들려고."
나는 죽을 떠먹으며 말했다. 끗발이가 내 죽그릇을 노렸다. 나는 그릇을 슬쩍 틀었다. 사기꾼은 제 밥그릇도 등쳐먹히지 않는다.
"무림맹은 이십 년 안에 큰 싸움이 올 걸 알아. 그래서 영웅을 만들려는 거야. 영약으로, 인위적으로, 빨리. 한 명한테 다 몰아서."
내 손이 멈췄다.
이게 바로 그 그림이었다.
회귀 전, 무림이 망한 진짜 이유.
모두가 한 장의 카드를 만들려 했다. 가장 강한 영웅 하나. 거기에 천하의 영약과 비급과 자원을 다 몰았다. 그리고 그 카드가—
나였다.
검신. 그들이 만든 마지막 카드. 그 카드 하나만 남기고 전부 죽은 판.
빗속 시체 산이 눈앞에 깜빡 떠올랐다 사라졌다. 나는 죽 한 술을 더 떴다. 뜨거웠다.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죽은 자는 혀를 안 덴다.
"그게 왜 문제야?"
나찬이 물었다.
"강한 놈 하나 있으면 좋은 거 아냐?"
나는 죽그릇을 내려놨다.
"좋지. 그 한 놈이 모두를 지킬 수만 있다면."
처마 밖으로 비가 내렸다. 분홍빛은 아니었다. 아직은.
나는 그 빗줄기를 한참 봤다. 분홍이 되기까지 이십 년. 길다면 길고 패 한 바퀴면 짧다.
"근데 한 놈이 아무리 세도 모든 곳을 지킬 순 없어. 그놈 손이 못 닿는 곳부터 죽는 거야. 나머지는 제 몸 지킬 힘도 못 길렀으니까."
나찬이 입을 다물었다. 어제까지 복수만 알던 놈이, 처음으로 제 머리 위 판을 들여다보는 눈이었다.
"그래서 난 반대로 갈 거야. 한 장 말고, 패를 잔뜩 만들 거야. 너 같은 버려진 천재들을. 서로가 서로를 키우게."
[패안(牌眼)] 패주: 나찬 · 일류 (익힌 것) 인격: 복수심 90 / 신뢰 5 막힌 곳(인격) 항목은 "혼자 강해지면 된다"는 착각 비고: 능력은 키웠다. 사람은 아직 안 됐다.
능력은 일류가 됐다.
근데 사람은 아직 어제 그 자리에 있었다. 복수밖에 모르는.
이게 천재를 키우는 진짜 어려운 부분이다. 검을 키우는 것보다, 사람을 키우는 게 백 배 어렵다.
검은 베면 늘고 사람은 베면 비뚤어진다. 나는 그걸 너무 늦게 배웠다. 회귀하고 나서야. 등 뒤에서 후배들이 다 식어 버린 다음에야.
"가르쳐 주진 않을 거야. 근데 보여는 줄게."
나는 일어섰다.
"가자. 학관 하나 차리자."
성 외곽, 다 쓰러져 가는 폐가를 샀다. 노름으로 딴 은자로.
졸부한테 등쳐낸 은자가 폐가 한 채로 둔갑했다. 사기꾼의 돈은 원래 그렇게 돈다. 남의 주머니에서 내 주머니로, 다시 무너진 기와집으로.
마당엔 잡초가 허리까지 자라 있었다. 지붕은 한쪽이 주저앉았고 우물엔 낙엽이 썩고 있었다. 누가 봐도 사람 살 데가 아니었다.
딱 좋았다. 버려진 집에, 버려진 천재. 궁합이 맞는다.
대문에 간판을 걸었다. 직접 쓴 글씨라 삐뚤빼뚤했다. 칼은 삼십 년 휘둘렀어도, 붓은 영 아니었다.
막판무관(莫判武館).
"……막판? 무슨 무관 이름이 막판이야."
나찬이 어이없어했다.
"마지막 판이라는 뜻이지. 인생 막장까지 간 놈들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고."
나는 그 밑에 작은 글씨로 한 줄 더 적었다.
— 버려진 천재만 받음. 수업료 선불.
나찬이 그 글씨를 한참 노려봤다.
"수업료 선불? 누가 와. 폐가에다, 사부는 열여덟짜리 노름꾼에다."
"올 거야."
나는 자신 있었다.
세상엔 버려진 천재가 널렸으니까. 명문이 안 거둔, 가문이 도구로 쓴, 재능이 있어서 오히려 짓밟힌 놈들이. 재능은 축복이 아니라 빚 문서다. 가진 놈이 등쳐먹기 딱 좋은.
회귀 전, 그런 놈들이 내 뒤에서 얼마나 많이 죽었는데.
이번엔 내가 먼저 줍는다. 명문이 줍기 전에, 혈겁이 줍기 전에.
끗발이가 간판 위로 폴짝 뛰어올라 자리를 잡았다. 마치 자기가 이 무관 주인인 양, 앞발을 모으고 거드름을 피웠다.
"끗."
"그래, 너도 식구다. 밥값은 해."
"끗!"
밥부터 달라는 소리 같았다. 식구 되자마자 외상부터 긋는 놈이었다.
첫 손님은 그날 저녁에 왔다.
손님이라기엔, 끌려온 쪽이었다.
해가 기울고 잡초밭에 노을이 깔릴 무렵이었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와 가마꾼 발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비단 가마가 막판무관 앞에 섰다. 호위 무사가 열은 됐다. 폐가 앞에 어울리지 않는 행렬이었다. 거지 소굴에 황금 마차가 선 꼴이다.
가마에서 사내가 내렸다. 비단옷, 기름진 미소. 한눈에 명문가 사람이었다. 돈 냄새와 거만이 향수처럼 풍겼다.
그 뒤로, 소녀 하나가 끌려 나왔다.
손목에 쇠고랑이 채워져 있었다. 열일곱쯤. 눈빛만 살아 있고 온몸이 멍투성이였다. 며칠은 굶긴 듯 비쩍 말랐는데, 눈만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다.
나는 무심코 패안을 열었다.
그리고 숨을 멈췄다.
[패안(牌眼)] 패주: 미상 소녀 · 17세 보이는 패: 검 — 이류 (눌려 있음) 숨은 패: 검신(劍神)에 닿을 검재 — 봉인·학대로 억눌림 깨달음: 본인도 모르는 채 이미 절정 직전 막힌 곳: 벽이 아니라 쇠고랑. "휘둘러도 된다"는 허락
손이 떨렸다.
삼십 년 검을 쥐고도 안 떨던 손이, 패 한 장에 떨렸다.
나찬은 백 년에 하나였다.
이 아이는 — 그 위였다.
검신에 닿을 재능. 그런데 이류로 눌려 있었다. 누가 일부러 짓밟아서.
영약으로 산 천재가 한 발쯤 위라면, 이 아이는 타고난 패였다. 산 게 아니라 본디 제 손에 들린 패. 그런데 그 패를, 누군가 십수 년을 발로 밟아 흙에 처박아 둔 거다.
아까운 정도가 아니었다. 죄였다. 누군가의.
비단옷 사내가 막판무관 간판을 보고 코웃음 쳤다. 그리고 간판 옆에 선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솜털 난 얼굴, 깡마른 어깨. 한 푼어치도 안 되는 애송이를 보는 눈이었다.
"여기가 버려진 천재만 받는다는 데냐? 관주는 어디 있고. ……설마 이 애새끼?"
"왜. 어려서 안 사 줄 것 같아?"
"풉. 솜털도 안 벗은 게 무관이라니. 마침 잘됐군."
그가 소녀의 쇠고랑을 발로 툭 찼다. 쇠가 절그럭, 비웃듯 울었다.
"이년, 가져가라. 검 천재라고 사 왔더니 영 말을 안 들어서 말이야. 환불은 안 되겠고, 버리긴 아깝고. 폐품 처리장이 있다길래."
폐품.
검신에 닿을 패를, 저놈은 폐품이라 불렀다. 끗발 좋은 패를 끗발 없는 눈으로 보면 저렇게 된다. 호구의 가장 확실한 증거다. 제 손에 든 보물을 쓰레기로 아는 것.
소녀가 고개를 들었다. 눈에 살의가 번뜩였다. 하지만 손목의 쇠고랑이, 그 살의를 비웃듯 절그럭거렸다.
휘두를 줄 아는데, 휘두를 허락을 못 받은 검.
세상에서 제일 슬픈 칼이다.
나는 천천히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눈높이를 맞췄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눈은, 이 아이가 평생 본 눈이다. 나까지 그러면 안 됐다.
"이름이 뭐야."
소녀가 나를 노려봤다. 한참 만에, 갈라진 목소리가 나왔다.
"……연하린."
"하린아."
나는 웃었다. 천수의 웃음이 아니라,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막판무관, 두 번째 학생. 환영한다."
천재 하나로 시작한 판에, 더 센 패가 굴러들어 왔다.
묻고 더블로 간다.
비단옷 사내가 비웃었다.
"애새끼 관주에 폐품 학생이라. 잘 어울리는—"
그가 말을 끝내기 전이었다.
끗발이가 간판 위에서 벌떡 일어나, 사내 뒤쪽을 향해 미친 듯이 울었다.
"끗! 끗! 구라! 구라아아!"
거짓을 짚는 소리. 위험을 짚는 소리. 둘이 한꺼번에 터졌다. 끗발이가 저렇게 우는 건, 마스코트가 재롱 떠는 게 아니다. 경보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가마 그늘 속, 호위 무사인 척 서 있던 사내 하나가 — 나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다른 무사들은 다 비단옷 자제를 봤다. 그놈 하나만, 나를 봤다. 패를 든 자의 눈이었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천수(千手)."
심장이 멎었다.
회귀 전, 그 이름을 알던 자들은 전부 죽었다. 혈겁에서. 나 빼고 전부.
천수는 검신이 되기 전의 이름이다. 노름판이나 털던 애송이 시절의 이름. 그 이름을 아는 자는, 그 시절의 나를 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시절의 사람들은—
전부 분홍빛 빗물 속에 누워 있다.
그런데 회귀한 지 며칠 만에 누가 그 이름을 부른다.
"틀림없군. 손버릇이 똑같아. 골패상을 등쳐먹는 방식이."
사내가 미소 지었다. 그 옷깃에—
어제 봤던 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검은 상자에 박혀 있던, 혈겁의 첫날에 봤던 그것.
"천수. 아니면 — 다른 이름으로 불러 드릴까?"
그가 한 발짝 다가섰다.
솜털 난 열여덟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그가 속삭였다.
"검신(劍神)."
빗소리가 멀어졌다. 잡초밭도, 끗발이 울음도, 하린의 쇠고랑 소리도, 전부 멀어졌다.
이번 생의 가장 큰 패가, 무관 문을 연 첫날부터 까일 위기였다.
딜에 앉힌 천재: 1명 (나찬 · 일류). 하린 — 데려왔으나 아직 미각성(쇠고랑). 새 미결산: 누가, 무관 문을 연 첫날에, 전생 검신의 이름을 꺼냈는가? 검신의 정체: 들켰는가? 검을 뽑으면 끝이다 — 또 '한 장'이 되니까. ……그래도 패를 까야 하나? 혈겁까지: 약 20년.